1999년 12월 월간미술 뉴 밀레니엄 특별기획에 기고된 심광현교수의 전문 내용입니다.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출품한 이후, 20세기 미술은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재정의하려는 노력으로 일관해 왔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비평과의 관계에 의존하지 않게 된 일련의 흐름은 새로운 비평 영역의 확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세기의 전환을 앞둔 지금, 모더니즘은 포스트 모더니즘·후기 구조주의에 자신의 공백을 내어놓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조 역시 모더니즘의 공백을 채우지는 못하였다. ▲ 아트선재센터 경주 별관의 전시 장면 -->비평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비평적 행위다.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대신 행위의 ‘대상’에 대한 반성과, 반성의 근거와 방법 자체를 문제삼는다는 데에, 말하자면 어떤 행위와 행위의 대상을 ‘메타화’한다는 데에 비평적 행위의 특징이 있다면, 미술비평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메타화’ 방식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반성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세기 미술비평의 역사를 반성의 대상으로 삼을 경우 나타나는 어려움의 하나는 20세기 미술의 역사 자체가 이미 이와 같은 ‘메타화’방식의 역사였다는 점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917년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출품하여 물의를 일으켰던 이래 20세기 미술의 역사는, 합의된 ‘미술작품’의 개념을 전제했던 과거 미술의 역사와는 달리 ‘매번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재정의하려는 노력들’의 역사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창작 행위의 주안점이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재정의한다”데에 놓여 있다면, 창작과 비평의 전통적인 관계가 해체되고 창작 자체가 매번 일련의 비평 행위가 된다. 20세기 미술에는 미술작품은 없고 미술에 관한 담론(painted word)만이 무성하다는 비판(톰 울프)은 이로 인해 나타나는 불편함을 지시하는 것이지만, 이런 현상은 역으로 ‘비평 영역의 확장’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확장된 의미에서의 비평에는 ‘미술행위에 대한 비평’만이 아니라 ‘비평적 행위로서의 미술’이 함께 포함될 수 밖에 없고, 바로 이런 지점에 주목할 때라야 20세기 미술비평이 그 이전과 구별되는 중요한 분수령이 포착되지 않을까 싶다. 뒤샹이 제기했던 바와 같은 ‘비평적 행위로서의 미술’이 골치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미술을 대할 때, 통상은 문
Fractal Story
2010년 7월 8일
Mond